대한제국과 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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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2-12 10:3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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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발전적인 계획은 수구파들의 모략으로 좌절되었다.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립헌군주제)로 개혁하여야 한다고 한 반면, 수구파는 전제군주제(전제군주제)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한 후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칭제건원(칭제건원)을 추진, 8월에 연호를 광무(광무)로 고쳤으며, 9월에는 원구단(환구단)을 세웠고, 1897년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제를 계속 추진하여 1898년 11월 2일 중추원신관제(중추원신관제)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이러한 시도도 중단되었으나 이로부터 10년 후 갑오경장 때 온건개화파의 집권으로 다시 국왕의 지위를 황제의 지위로 높이려는 운동이 추진되었다.
(2) 대한제국의 정치체제 논쟁
대한제국의 성립 후에는 그 정치체제를 놓고 개화파인 독립협회와 친로수구파 사이에 정치적 견해가 크게 대립되어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들은 독립협회가 의회를 설립하는 것이 아니라 고종을 폐위하고 박정양(박정양)을 …(省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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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인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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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과 독립협회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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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대한제국과 독립협회
1. 대한제국
(1) 대한제국의 성립
대한제국 성립의 추진은 갑신정변 때의 급진개화파들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따 그들은 조선 국왕을 china의 황제와 동등한 의례적 지위에 놓으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고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다. 그들은 국왕의 formula적 호칭인 ‘군주(군주)’를 ‘대군주(대군주)’로, 국왕을 ‘전하’로 부르던 것을 ‘폐하(폐하)’라고 높여 부르도록 하였으며, 왕의 명령을 ‘칙(칙)’으로, 국왕 자신도 스스로를 ‘짐(짐)’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황제와 政府(정부)는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쳐 내외에 선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다시 ‘대군주’로 호칭하도록 하고, 연호로 조선왕조의 개국기년(개국기년)을 사용토록 하였으며, ‘대군주’로부터 ‘황제’로 격상시키려하였으나 일본 및 열강들의 반대에 이루어지지 못했다.